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포이 항쟁 (문단 편집) == 이후 == ||인도 통치 개선법 제1조 지금까지 동인도 회사가 점유했거나 통치했던 영토와 그 권력을 영국 여왕 폐하가 대신한다. 제2조 여왕 폐하의 국무위원 중 한 사람은 동인도 회사가 가졌던 권력과 그 의무를 모두 가지고 실행한다. 제39조 동인도 회사의 토지, 부동산, 금전, 저당품, 상품, 재산, 그 밖의 부동산과 동산은 이 회사의 자본금과 배당액을 제외하고 폐하에게 귀속된다.|| 항쟁 이후, [[영국]]은 무굴 제국 황제를 [[폐위]]시켜 추방, '''[[무굴 제국]]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한다.''' 이듬해 [[1858년]]에는 인도 통치 개선법이 하원되어 [[동인도 회사]]가 영국 정부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고 해체되었기에 아예 직접 통치로 전환한다. 이후 총독에 의한 정치를 지나 1877년에는 영국의 [[빅토리아 여왕]]이 '인도의 황제' 자리에 올라 [[황제]]를 칭하고 '''영국령 [[인도 제국]]'''이 세워진다.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[[바하두르 샤 2세]]는 [[영국령 버마]]로 귀양을 가서 쓸쓸하게 죽었고 그의 아들들은 영국에 대항한 죄로 투항한 [[황후]] 지낫 마할의 세 아들을 제외하고 전원 처형되었으며 딸들은 영국 장교의 [[첩]]이 되었다. 당시 영국은 [[제2차 아편전쟁]]도 겪었기 때문에 양쪽에서의 전쟁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정책을 수정하게 된다. ~~정작 청나라는 영국이 세포이를 진압하는 동안 그냥 손놓고 있다가 박살나지만~~ 물론 식민지를 위해서가 아닌 본국을 위한 것이었고 인도인의 처우가 나아지거나 정치적 권리가 더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.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[[동인도 회사]]의 댈후지 사장은 세포이 항쟁 1년전인 1856년에 임기를 마치고 영국으로 귀국했는데, 세포이 항쟁이 터지자 마자 영국 국내에서 사태를 만든 가장 큰 원흉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면서 정치 생명도 끝나고 4년 뒤인 1860년에 죽었다. 게다가 생전에 쌓은 공로로 댈후지 [[백작]]을 [[후작]] 작위로 승작하는데 성공했으나, '''아들이 없어서 [[락슈미 바이]]와 [[인과응보|같은 이유로 후작 작위는 단절]]'''당하고, 백작만 겨우 [[사촌]]에게 계승했다. 문제가 된 엔필드 1853 패턴은 종전처럼 머스킷 볼을 사용하는 구식 카트리지를 쓸 수 있도록 '''내부 강선을 갈아 평평하게 만든''' 엔필드 1858 인도 패턴으로 개조되었다. 이는 필연적으로 명중률 및 위력의 저하를 불러왔으며, 총열 두께가 줄어듬에 따라 폭발사고가 빈번해지게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